Owl-Networks Archive
| 분류: 정리된 생각 | 최초 작성: 2003-06-19 17:39:39 |
1. 어제, 도리군의 소개로, 01410.net 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Web에서 옛날 모뎀(혹은 텔넷)통신망을 구현해놓은 멋진 곳이었다. 나도 모뎀으로 통신을 시작한 사람으로써,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유료회원으로 천리안 VT를 이용하는 이용자의 한 사람으로써, 갑자기 눈앞에 뜨는 정겨운 화면에 감격과 함께 묘한 친근감을 느꼈었다.
2. 나는 이 글을 통해서 01410.net 이야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많은 사람들이 그 투박한 퍼런 화면에 열광하고, 또 그것이 신문과 TV에 뉴스거리가 되는지, 한번 짚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 평소 생각하고 있던 주제와 공통되는 부분도 있고 해서, 한번 글로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3. 내가 컴퓨터 통신이란 것을 시작한 때가, 아마도 1992년 3월이었을 것이다. 그때 386컴퓨터를 구입하면서, 당시 컴퓨터 매장에서 “호롱불 3.94”(이 프로그램도 이제는 추억의 프로그램이 됐다.)로 운영하던 사설BBS에 가입한 것이 내 통신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약 1-2년간 당시 수없이 많았던 여러 사설BBS들을 들락거렸다. 당시 나도 한번 사설BBS를 운영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호롱불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친구녀석들(그러고 보니 그놈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에게 전화로 접속하라고 졸라댔던 기억이 있다. 밤중인데 전화벨이 울리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 일부러 마루의 전화 코드를 뽑아놓기까지 했던 그 때.
1993년 11월 6일(날짜까지도 기억한다.)은 내 통신생활의 폭이 더 넓어진 날로 기억될 것이다. 바로 천리안에 처음 내 아이디를 입력하고 접속한 날이다. 처음에는 하이텔에 가입할 생각이었으나, 그날따라 주변의 하이텔 노드가 접속이 안 되어서(그때는 01410이나 01420 같은 것도 없었을 때다.) 결국 천리안에 가입했었던 기억이 있다.
4. 그로부터 약 10년 동안 천리안이라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거쳐온 곳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처음에는 정말 자료만 받았다. (난 웬일인지 채팅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러다가 동호회라는 곳을 알게 됐다. 초보자의 뜰 동호회, 역사동호회(동호회 활동이라는 걸 처음 해본 곳이 여기였다. 온라인 역사토론. 비록 3번 참여하고 나가리가 나긴 했지만…….), 추리문학 동호회, 채소소프트 프로그래밍 동호회(그리고 여기서 샤프로라는 게임제작툴을 만났고, 지금까지도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코스모스 동호회, 가수 이문세 팬클럽, 가장 최근에 활동을 시작한 곳인 음유시인의 이야기마을…….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5. 지금은……. 통신시절의 그 영화는 이제 온데간데 없다. 문자기반의 통신망을 운영하던 많은 회사들 - 천리안, 하이텔, 포스서브, 유니텔, 나우누리… - 은, 이제 하나둘씩 웹기반 서비스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물론 기존의 VT서비스도 계속 하고 있긴 하지만,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없는 서비스는 하나둘씩 사람들을 인터넷으로 내쫓았고,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간 통신공간은 찬바람만 씽씽 부는 황량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6. 지금의 인터넷 공간은, 그때의 통신공간과는 비교도 안되게 넓어졌다. 초고속 통신망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전화비 걱정 없이 월정액으로 인터넷을 이용한다. 쉬워진 인터페이스와 빨라진 속도 덕에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누구라도 조금만 배우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통신공간 당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향상된 검색기능은 필요한 자료들을 그전보다도 더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나만의 공간, 우리들만의 공간을 만들기도 더 쉬워졌다. 동호회 하나 만드는데도 상당히 엄격한 제약이 따랐던 통신공간.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누구라도 계정만 있으면 그런 공간은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오로지 글자와 그림문자만을 사용하던, ANSI코드로 만들어진 화면이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었던 통신공간의 모습은 인터넷상의 화려한 웹 페이지에 비하면 오히려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우리의 사이버 공간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7. 그러나, 우리들의 통신환경은 그때와 비교하여 과연 나아졌는가. 상술한 수많은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때는 우리들 사이에 암묵적인 규율이 존재했다. 어디엘 가도 그 공간의 어른이 있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든 것은 나름대로의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도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부의 자체정화 기제로 인해 그것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요즘도 문제가 되는 소위 통신어투의 문제도 당시에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통신어체는 시분제 전화요금제도 하에서 단 1초라도 접속시간을 줄여보려는 상황적 당위성이 있었다. 물론 당시의 통신상 어르신들도 그런 통신어체(?)에는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표출하시긴 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서로 의사 소통 하는데 별 문제는 없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그런 축약어를 쓰셨으니 말이다. 게다가 당시의 통신어체는 말 그대로 그냥 글자 한두 자 줄이는 수준의, 처음 보는 사람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전혀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수없이 많았던 동호회들. 상당수는 가입신청을 해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가입심사를 했었다. (당시에 어떻게 가입신청서를 쓰면 시삽님이 잘 받아주실까 고민하면서 몇십 분씩 들여가면서 가입신청을 했던 걸 생각하면, 요즘의 “다 받아줘라~”식의 동호회 시스템(물론 아닌 곳도 있긴 하지만.)은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렇게 힘들게 가입했던 모임들. 그 안의 공간은 그 밖과는 또 다른 끈끈한 정이 흘렀다. 혈육으로 이어진 가족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 모두 xx동호회 가족”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의 인터넷 공간은 어떤가. 소위 열린 공간이라고 미화되는 인터넷 공간은,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으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은, 순기능도 있지만 그 역기능도 만만치 않았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들은 너무나 많아져서, 이제는 아예 흐린 물이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일어나는 통신상에서의 싸움과 언어폭력, 예절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게시판들, 그 옛날의 결속력과 가족같은 정을 찾아보기 힘든, 도대체 소통이라는 것이 사라진 커뮤니티 사이트들, 공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수많은 메뚜기들, 책임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도 찾아볼 수 없는 소위 불량 네티즌들, 공간을 점점 가득 채워가는 수많은 스팸 쓰레기들,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화되는 사이버상의 각종 범법행위들…….
8. 이러한 문제들은 단지 “이용연령층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버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것도 큰 원인이기는 하다. 초고속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라도 쉽게 인터넷의 바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PC방의 증가로 늘어난 인터넷 인구는 필연적으로 저연령층의 인터넷 사용을 확산시켰다. 게다가, 일부 생각없는 저연령층 이용자들의 행태는 우리 모두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오죽하면 “초딩”이라는, 다분히 모욕적인 의미의 단어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너무나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기에, 우리는 어느 새 우리의 이 인터넷 공간을 ‘당연히 주어지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해버리고 있지 않나 싶다. 소중하지 않기에 책임을 느낄 수 없게 되고, 그렇다 보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우리는 너무 쉽게 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9. 어찌 보면 01410.net 과 같은 사이트의 출현은, 그냥 “복고적 유행”으로 가볍게 다룰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과거 통신세대가 소중하게 가꾸었던 그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일 것이다. 단지 문자와 파란 화면에의 향수가 아니라, 그 안에서 펼쳐졌던 끈끈한 정, 알게 모르게 서로를 배려하던 모습들, 이런 것들에의 향수일 것이다. 우리의 인터넷 공간에서, 이런 모습을 볼 날이 과연 언제쯤일까.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진다.
추신. 아래 연합뉴스 기사가 나간 후, 누군가 01420.net 도메인을 선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얄팍한 상술.. 이라고 매도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없는 씁쓸함이 가슴 한 구석을 찌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첨부. 연합뉴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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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uto~★ 님께서 2003-06-28 16:32:54 에 작성해주셨습니다.
천리안도 그런거 있어야 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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