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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용을 은닉한 인용, 그 윤리의 문제

| 분류: 정리된 생각 | 최초 작성: 2009-01-05 06:29:23 |

어떤 방식이든, 그리고 어떤 내용이든, 글을 쓰다 보면 다른 사람의 글이나 생각을 인용 내지는 전재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경우에, 그것을 그대로 인용 또는 전재하고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경우 그것은 표절이다. 명백한 부정행위이이지만, 최근까지도 이러한 행위가 별다른 죄의식 없이 행해져왔던 것이 현실이다. 나만 하더라도, 대학교 1학년 때 썼던 보고서들을 지금 열어보면 (나름 인지는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여러 건의 "명백한" 표절행위가 발견되곤 한다. (그것이 단 한 줄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뭐, 학생들만 그런가. 교수님들 조차도 이따금씩 표절 시비에 휘말려들곤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주소 아니던가. 그나마 요즘은 이러한 인용윤리에 대한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논의되는 상황이기도 해서, 대체로는 어느 정도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것만이 표절은 아니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런 일반적인 형태의 표절이 아니라, 실상은 재인용이면서 겉으로는 직접인용인 것처럼 글을 쓰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어제 아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오늘 인터넷을 돌다가 아주 재미있는 글을 본 탓에, 결국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전제 : 내가 A라는 글을 쓰고 있고, 그것을 위해 B라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 그 B라는 글에서 C라는 문헌을 인용하면서 어떤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쓰고 있던 A라는 글에 이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1) 어떠한 인용주도 없이 그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다. (이건 명백한 표절이다.)
2) B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없이, C는 읽지도 않은 채로 "C에서 인용함" 이라고 인용주를 기록한다.
3) C의 해당 부분만 발췌독한 후, "C에서 인용함" 이라고 인용주를 기록한다. 역시 B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4) "C에서 인용함" 이라는 주를 달았지만, B와는 독립적으로 C라는 글 전체를 정독하여 완전히 이해하였다.
5) C를 읽지 않았거나, 읽더라도 해당 부분만을 발췌독한 후, "C. B에서 재인용함." 의 형태로 재인용주를 기록한다.


대충 이런 경우들이 있을 수 있겠는데, 1)이야 명백한 표절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5)의 경우에도 인용주가 아닌 재인용주를 달았기 때문에 (그 성실성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나머지 2)~4) 의 경우다.

2)의 경우는 별 다른 문제 없이 윤리적인 비난을 가할 수 있다. C를 실상 읽지도 않았음에도 C에서 인용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사실은 B를 인용한 것임에도 B에게서 인용하였음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선행 문헌인 B의 (학문적인) 공헌에 무임승차하였다는 점(그리고 그것이 B의 작성자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것인 한, B에게 있어서는 표절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3)의 경우 역시 그 정도는 덜하지만 실상 2)와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C에 눈도장만 찍으면서, C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글의 격을 높이려는 작태 (대개는 B가 인용한 C의 글이 상당히 권위 있는 문헌일 경우일 것이다) 로써 오히려 2)보다 도덕적으로는 더욱 비난받아야 할 지도 모른다.

문제는 4)의 경우다. B를 통해서 C문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계에서 C 역시 B와 마찬가지로 전체를 정독함으로써 (B를 참고문헌으로 기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C 역시 독립적인 참고문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그 부분에서 B를 빼고 C에서 인용하였다고 기록하는 것이 연구윤리에 어긋나는 것일까? 분명히 C 전체를 읽고 그 논지를 나름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C를 인용한 것인데도?

사실 나 역시 위 4)와 같은 행위를 한 적이 있다. 국회도서관 문헌정보시스템에서 아무리 찾아도 관련된 문헌이 안 나오길래 거의 포기하고 있다가, 그 내용에 살짝 숟가락 하나 얹은 다른 논문에서 상당히 깊은 연구를 한 다른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해당 논문의 전문을 구해서 이를 정독했다. 그리고 실제 글을 쓰면서 그 논문을 인용했고, 중간의 그 "숟가락 하나 얹은" 수준의 그 논문을 그 부분에 대한 각주에서 제외했다.*1) 난 지금도 이것이 어떤 연구윤리에 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 선행논문을 전혀 읽지도 않거나 발췌독만 한 채로 무책임하게 재인용주를 닮으로써 그 내용에 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5의 경우)보다는*2) 훨씬 당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 이유는 있었다. 그 선행 논문을 인용한 중간 논문이 그 내용에 대해 어떤 새로운 내용이나 견해를 밝혔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선행 논문에서 논의한 내용을 대충 요약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중간 논문은 그 내용을 다루는 논문이 아니었고, 그냥 지나가다가 관련된 내용이라고 몇 줄 적은 것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내가 이 글을 쓰면서도 "숟가락 하나 얹은" 수준이라고 폄하를 하고 있겠는가. 물론 그 중간 논문을 쓴 당사자는 이런 나의 글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상당히 나쁘겠지만.

2) 전에 어떤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여러 개의 관련 논문을 읽는데, 중간의 한 논문이 인용에서 "오타"를 내자 그 후속의 논문들이 전부 같은 오타를 낸 웃기는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선행 논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 명백한 오기나 오식이 있더라도 수정 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옳고, 다만 스스로 주를 달아 그것이 무엇의 오기 내지 오식임을 밝혀주는 식으로 인용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후속 논문들의 경우 그런 오류에 대한 지적도 없었다.) 보고서에 그 오류를 지적하는 각주를 달면서 속으로 엄청나게 웃었다. 교수님들도 별 수 없구나 하고 말이다.


물론 문제는 있다. 특히 앞에서 든 나의 사례 같은 경우, 그 중간 논문이 아니었으면 선행의 그 연구성과에 접근하지 못한 채로 나의 글이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나의 글 안에서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B(의 저자)에 대해 사의(謝意)를 밝히는 것이 떳떳하기는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100퍼센트 떳떳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용에 있어서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학위논문에 머리말이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웃기지 않은가?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물론 난 4)의 경우 직접인용이 연구윤리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이 옳은 걸까?



앞에서 내가 "재미있는 글"을 봤다고 했는데,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 동기는 그 글 때문이다. (바로 하루 전에 친구와 그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나와 관련해서 그런 일이 벌어져주는 걸 보면 나보고 이 글을 쓰라고 운명이 사주를 한 모양이다.) 경위는 이렇다.

내가 이 홈페이지에 써서 공개한 어떤 글을 그 글이 사실상 거의 그대로 전재를 했다. (내가 썼던 글이 좀 길었는데, 사실상 내 글의 요약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그 인용에서 나의 글은 빠지고 내가 인용했다고 기술했던 그 원래의 외국 문헌만을 글의 출처로 적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인용을 하면서, 그 외국 문헌에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는 내용(내가 부연설명을 위해서 스스로 추가한 내용이다)까지도 마치 그 외국 문헌에서 인용한 것처럼 쓰고 있더라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원래의 글을 읽어보고 인용 표시를 했으면 절대로 그런 글은 나올 수가 없을 텐데도. 속으로 엄청 웃었다. 내가 그 글에 인용주를 달면서 그 범위를 조금 애매하게 적어 놔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글 전체가 적시한 그 외국 문헌에서 인용한 것인 것 처럼 오해될 소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그렇게 "적절하게" 낚여 주시는 것을 보니, 참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딱하다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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