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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를 나왔다는 것.

| 분류: 나에게 하는 이야기 | 최초 작성: 2009-07-13 21:00:31 |

0.

여기 오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난 지난 2006년 2월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아직 사법시험에 합격 못한 채로 사회복무를 하고 있지만,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법학부의 최고학부를 졸업했다는 사실은 어디 안 간다. 그 때문인지, 가끔 주변에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얼마 전에는 새벽 1시에 졸린눈을 비비며 한 친척의 전화를 받았고, 오늘은 훈련소 동기생 녀석이다. 꼴에 법대 나왔다고, 걸려오는 전화 외면할 수 없어서 전화 받고 아는대로 설명해 주고 전화를 끊곤 하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건 거의 언제나 답답함과 허탈함, 그리고 두려움이다.

1.

가장 답답한 건, 내가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걸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일 거다. 애초에, 아직 1차도 통과 못한 사람에게 뭘 바라겠는가. 서울법대 나온 고시 1차생 나부랭이보다는 이름없는 법대 나와 사법시험 합격한 변호사(하다못해 사법연수생)가 객관적으로는 훨씬 더 나은 실력을 갖고 있을 개연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런데도 나한테 전화하는 사람들에겐 서울법대 졸업했으면 뭔가 있겠지 하는 심리가 있다. 아예 대놓고 그렇다. 그래서 답답하다. 본의 아니게 (거절 못하고) 사이비 조언을 할 수밖에 없는 내 상황과,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전화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2.

이런 사이비 조언이라도, 그나마 맞으면 다행이다. 졸업은 했다지만 고시준비는 여태 헌민형 정도밖에 안 해본 1차생이 알아야 얼마나 알겠는가. 혹시라도 그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땐 그야말로 큰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법률가도 의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의사가 실수하면 살릴 사람을 죽일 수 있듯, 변호사가 실수하면 구제받을 수도 있을 권리를 (법적으로) 죽이고 만다. (혹은, 진짜로 사람 하나를 문자 그대로 죽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내가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막 보따리를 푼다는 건, 의대생이 좀 안다고 메스 잡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큰일날 짓이다. 내가 두려운 건 이 때문이다.

3.

그리고 허탈하다. 만약 지금의 내가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서)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면, 상황이 좀더 다를지도 모른다는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하기 힘든 사실 때문이겠다. 아니 애초에 내가 이 빌어먹을 수라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인생만사 어찌될 지 모르는 거라지만,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최근 얼마간을 뒤돌아보면 가슴속에 꽉 차는 건 허탈함 뿐이다.

4.

결국 오랜만에 또 삽들고 땅 파는 글이나 쓰고 앉았다. 그래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격으로, 이런 글이라도 쓰는 게 내 꽉 막힌 듯한 가슴을 푸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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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uto~★ 님께서 2009-07-14 16:25:50 에 작성해주셨습니다.

뭐 나도 그런걸...
마왕은 학부 전자과나왔으면 전자전기쪽은 빠삭히 알거라고 생각했다가 물 먹었고(난 먹인적 없지만)
박사 딴들 나 박사요하고 끝이지 실생활이나 다른 연구하는데는 전혀 도움 안되고, 그럴 실력도 안되니...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

□ kkaenda 님께서 2009-07-14 21:17:17 에 작성해주셨습니다.

프링글스 뚜껑 따는 소리 한다...(한번 열면 멈출수가 없다는....? -_-;;;) 나도 이번주 서울, 담주 국가 보면 8월부터 생계를 걱정해야는구나...ㅠㅠ

□ 범석 님께서 2009-07-16 17:47:11 에 작성해주셨습니다.

나도 한 5년전까지만 해도 정만형이 엄청난 법학 대가라고 생각했던 부류중 하나로..
지금은 법학 대가가 되었을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몇년 남았구만..
고생허소.

□ 비공개 님께서 2009-07-18 09:42:49 에 작성하신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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